3년 전에 로버트 레빈은 호암아트홀에서 현대의 고전음악 공연장에서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값진 경험을 선사한 바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과 즉흥연주를 통해 18세기 음악의 중요한 일면을 재조명하고 우리 시대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이켜 볼 수 있었던 매우 흥미진진한 연주회였는데, 그의 연주는 아주 즐겁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마도 피아니스트 로버트 레빈의 음악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고전음악 공연 문화에 대해 되돌아 보는 게 꼭 필요할 것 같아 보인다.
혹시 대중음악 애호가라면 고전음악 공연장의 분위기가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다는 의문을 느낀 적도 있지 않을까? 훌륭한 대중음악 가수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든 흔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원래의 선율을 변형하기도 하고 화려한 멜리스마를 덧붙여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중음악 연주자들은 단순히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즉흥적인 방법으로 창작 과정에 참여하며, 청중도 당연히 연주자의 애드리브에 즉각적으로 열광적인 환호를 보낸다. 대중음악에 관한 한, 우리는 작곡가보다는 청중과 직접 대면하는 연주자를 더 기억할 뿐만 아니라 사실 연주자는 작곡가 자신일 때도 많고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창작자이다. 또한 청중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한은 언제나 연주자의 새로운 변주를 기꺼이 환영하고 기대한다. 이것은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음악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고전음악 연주자들은 창작자라기보다는 재생산자요, 전달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작곡가와 연주자의 역할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연주자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곡보다는 과거의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겨 놓은 불멸의 명작들에 더 몰입하며 악보를 거의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따라야만 한다. 이 숭고한 '클래식' 작품들은 마치 박물관의 유물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지고, 청중은 연주자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미 잘 알고 있는 곡을 마치 신성한 종교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엄숙하게 침묵을 지키며 감상해야 한다. 고전음악이 태생적으로 대중음악과 다르기 때문일까? 사실은 고전음악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기만 하더라도 연주자들은 보다 자유로웠고 악보보다는 청중과의 관계를 보다 중요시했지만, 이제는 과거에 비해 악보에 너무 얽매여 대담한 모험심과 창의적 정신을 발휘할 여지가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틀린 음을 연주할까 봐 더 걱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청중은 객관적인 관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버트 레빈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 시대의 모습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로버트 레빈은 ‘작곡하는 피아니스트’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본질적으로 ‘연주하는 작곡가’이자 ‘작곡하는 연주자’였다는 사실과 통한다. 즉, 바흐든 모차르트든 베토벤이든 모두 청중과 직접적으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연주자였고, 그 시절의 모든 음악가는 스스로 작곡을 할 줄 알았기에 자신의 곡을 연주하든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든 자신의 방법으로 변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처럼, 레빈도 카덴차를 즉흥으로 연주하기도 하고 악보와는 다르게 장식을 자유롭게 삽입하거나 변형하기도 하면서 보다 ‘자발적으로’ 음악을 만들어 간다. 레빈이 이처럼 즉흥적인 화법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음악가와 청중이 가장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는 이와 같은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연주를 통해 “작곡가와 연주자 사이에 벌어진 간격, 옛 음악과 새로운 음악 사이의 간격, 대중음악과 순수예술음악 사이의 간격, 그리고 고전음악 연주자들과 청중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싶어한다.
무엇보다도 레빈의 관심은 항상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에 있다. 그는 과거의 공연 문화가 오늘날의 대중음악 콘서트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와 유사했음에 주목하며 자신의 연주를 종종 재즈나 영화에 비유하곤 한다. 그는 숭고한 예술 작품을 경건하고 아름답게만 연주하려 하기보다는 작품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감정을 살려 내어 연주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유연하고 변화무쌍하며 한 편의 오페라와도 같다. 때로는 우아하게 춤추면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때로는 슬프게 울기도 하며, 격정과 분노를 무서운 기세로 폭발시키는가 하면 고요히 사색하기도 하고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그는 똑같은 음악이라도 매번 새롭게 연주하여 지금껏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짜릿하고 신선한 충격과 모험과 스릴을 선사하면서 청중을 시시각각 놀라게 하고 자극시키며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려 한다.
그러나 레빈은 결코 제멋대로 연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학구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작품의 양식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작곡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연주자의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그는 뜨거운 열정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갖춘 연주자인 동시에, 음악 이론과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분석력과 인문학적 통찰력을 겸비한 엘리트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지성과 감성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상적으로 보여 주는 연주자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동료 음악가들에게도 깊이 존경 받고 있기도 하다. 가령 레빈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며 악보와는 다르게 장식을 입힌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고 바로 이런 것이 작곡가의 의도일 것이라는 학문적 신념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작곡가의 양식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그 작곡가라면 “어쩌면 이렇게도 연주했을 것”이라고 제시하며, 그것은 결국 그 작곡가의 언어로 표현된 레빈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레빈은 옛 작곡가들의 음악 언어를 터득하는 것을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비유한다. 외국어를 완전히 통달한 사람은 그 언어로 언제나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빈의 생각이다. 물론 그의 ‘외국어’ 실력은 신뢰해도 좋다. 이번 연주회에서 레빈이 바흐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언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구사하는지, 또는 이들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 직접 살펴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때 청중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잊지 말자.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청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에서 나오며, 이런 점에서 열정적인 청중은 음악회를 함께 만드는 또 다른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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